일본 '잃어버린 30년'의 진실, 우리에겐 착각이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우리의 착각이었다

최근 일본 증시가 활황을 보이고, 수십 년 만에 물가가 오르자 미디어는 일제히 '일본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정말 일본 경제는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만약 지난 30년이 우리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라면 어떨까요?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단정했던 그 시간은 사실, 고통스러운 체질 개선과 미래를 위한 재편의 과정이었을지 모릅니다. 이 글은 일본 경제의 표면적 지표 뒤에 숨겨진 기업들의 치열한 생존기와 혁신, 그리고 그 모습이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질문을 깊이 파고듭니다.


1. 일본 경제,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거대한 착각

우리는 일본 경제를 이야기할 때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말을 관용구처럼 사용합니다. 1990년 자산 거품 붕괴 이후, 장기 침체의 늪에 빠져 활력을 잃어버린 나라. 이것이 우리가 가진 보편적인 인식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프레임은 일본 경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거대한 착시를 일으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이 30년 내내 침체에 빠져 있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또한, 최근의 긍정적 신호들이 갑작스러운 부활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진행되어 온 구조적 변화의 결과물이 이제야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에 가깝습니다.

경기는 끊임없이 순환했다

일본 경제 역시 부침을 거듭하는 비즈니스 사이클을 겪었습니다. 대표적으로 2003년에서 2007년 사이, 그리고 아베노믹스가 시작된 2013년부터 2018년까지 뚜렷한 호황기가 존재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기업 실적이 개선되고 고용 시장이 활기를 띠며, 한때 '완전 고용'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기업 도산 건수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정점을 찍은 이후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를 보입니다. 이는 경제 위기 속에서 경쟁력을 잃은 기업들이 정리되고, 살아남은 기업들을 중심으로 경제 체력이 점차 회복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30년이라는 긴 시간 전체가 아닌, 그 안에서 반복된 순환과 점진적인 체질 개선의 과정입니다.

GDP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 이유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일본 경제가 계속 나빴다고 생각했을까요? 이는 우리가 GDP(국내총생산)라는 지표에만 매몰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과 같은 성숙한 저성장, 인구 감소 사회에서 GDP는 경제의 실질적인 건강 상태를 보여주기 어려운 지표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를 겪으며 생산가능인구와 전체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20대 초반 인구만 보더라도 과거 1,000만 명 수준에서 현재 600만 명으로 급감했습니다. 내수 시장(Domestic Market)이 구조적으로 축소되는 상황에서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이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한 일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 기업들의 전략 변화입니다. 일찌감치 내수 시장의 한계를 깨달은 주요 기업들은 해외로 눈을 돌렸습니다. 현지에서 생산하여 현지에서 판매하고, 거기서 번 돈으로 다시 현지에 투자하는 방식이 보편화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식품 기업 아지노모토의 경우, 공장 등 유형 고정 자산의 38%만이 일본에 있고 나머지 62%는 해외에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해외에서의 성과는 일본의 GDP에 직접적으로 잡히지 않으므로, GDP 지표는 일본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집니다.


2. 폐허 속에서 피어난 일본 기업들의 부활

일본 경제의 진짜 이야기는 거시 지표가 아닌, 개별 기업들의 미시적 변화 속에 숨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20년' 동안 수많은 기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살아남은 기업들은 처절한 혁신을 통해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생존과 도태: 고통스러웠던 구조조정의 시대

산요(Sanyo)는 공중분해되었고, 샤프(Sharp)는 대만 기업에 인수되었으며, 도시바(Toshiba)는 핵심이던 반도체 사업을 매각해야 했습니다. 한국 및 중국 기업과의 치열한 '범용 제품' 가격 경쟁에서 밀려난 기업들은 가차 없이 도태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일본 사회 전체에 깊은 위기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환골탈태: 소니와 히타치가 보여준 혁신

이러한 위기 속에서 생존을 넘어 부활에 성공한 대표적인 기업이 바로 소니(Sony)입니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극심한 부진에 시달리던 소니는 상장 이후 처음으로 무배당이라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모두가 소니의 몰락을 이야기할 때, 소니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 선택과 집중: PC 사업부(VAIO)를 매각하고, TV 사업은 프리미엄 라인만 남기는 등 한국, 중국 기업과 경쟁하는 분야를 과감히 정리했습니다.
  • 체질 개선: 대신 게임(플레이스테이션), 음악, 영화 등 콘텐츠 사업과 스마트폰의 눈 역할을 하는 이미지 센서 같은 독보적 기술 분야에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소니는 TV나 워크맨을 만들던 전자 회사가 아닌, 게임, 네트워크 서비스, 콘텐츠, 금융을 아우르는 복합 기업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실제로 2021년과 2022년에는 2년 연속 1.2조 엔이라는 경이적인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완벽한 부활을 증명했습니다.

히타치(Hitachi)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반도체, 가전 등을 만들던 종합 전기 회사에서, 지금은 스마트 팩토리 등에 솔루션을 제공하는 B2B 솔루션 기업으로 완전히 변신하여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도망쳐야 할 곳에서 확실히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가격 경쟁이 무의미한 시장에서 벗어나 누구도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한 것이 생존의 핵심 비결이었습니다.

위기 속 리더십의 힘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소니의 부활을 이끈 히라이 카즈오 전 CEO는 전자 부문이 아닌 소니 뮤직 출신의 '비주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조직을 설득하고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밀어붙여 혁신을 이뤄냈습니다. 전문경영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비전을 제시하고 실행하는 리더십이 일본 기업 부활의 핵심 동력이었던 셈입니다.


3. 일본 경제의 오늘은 한국 경제의 내일을 비춘다

일본 경제의 지난 30년은 단순히 한 국가의 장기 불황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고령화와 저성장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맞서 한 사회와 기업들이 어떻게 적응하고 변화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이제 막 같은 길에 들어선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당뇨병' 진단을 받은 한국 경제

저명한 경제학자의 비유처럼, 일본 경제는 '당뇨병'이라는 만성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국 역시 이미 '당뇨병' 진단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 고령화 속도: 한국의 고령화와 저출산 속도는 일본을 넘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 연금 문제: 국민연금 고갈 문제는 일본이 2000년대 초반 개혁을 단행했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청사진조차 없습니다.
  • 부동산 불안: 주거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은 채, 부동산 정책은 정권에 따라 극심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 가계 부채: 일본이 막대한 정부 부채를 감당할 수 있는 배경에는 탄탄한 가계 순저축이 있었습니다. 반면 한국은 가계 부채가 심각해 정부 재정의 완충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지표에서 한국은 일본보다 더 어려운 조건에서 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 삼아 미리 대비했어야 했지만, 우리는 '일본처럼 될 수 있다'는 경고를 20년간 반복하면서도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4. 일본 경제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일본의 부활이 과거 80년대와 같은 'Japan as No.1' 시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구 감소라는 거대한 족쇄가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기업들의 끈질긴 혁신과 사회적 조정을 통해 '성숙한 선진국'으로서의 지속 가능한 모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의 경험에서 배워야 할 것은 단순히 특정 산업 정책을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기를 직시하고 고통스러운 변화를 감내하는 용기입니다.

1. 기업의 과감한 재편: 한국 기업들 역시 다가올 미래에 경쟁력이 없을 분야는 과감히 정리하고, 대체 불가능한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는 '선택과 집중'이 절실합니다.

2. 초당파적 사회 개혁: 연금, 부동산 등 국가의 미래가 걸린 문제는 더 이상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여야가 함께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일본은 30년이라는 값비싼 시간을 지불하며 자신들의 길을 찾아냈습니다. 이제 질문은 우리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일본이라는 가장 가까운 '미래 모델'을 통해 배우고 다른 길을 개척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시간을 그대로 되풀이할 것인가. 선택의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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